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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피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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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피츠너는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186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성장했다. 그는 오페라, 가곡, 기악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오페라 《팔레스트리나》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피츠너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정권에 협력하며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4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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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피츠너
기본 정보
본명한스 에리히 피츠너
출생1869년 5월 5일
출생지, 모스크바
사망1949년 5월 22일 (80세)
사망지, 잘츠부르크
국적, , 헤센=나사우 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반다 폰 데브시츠-쿠노프스키가 촬영한 한스 피츠너 (1910년경)
반다 폰 데브시츠-쿠노프스키가 촬영한 한스 피츠너 (1910년경)
학력
학교코블렌츠 음악원
직업
직업작곡가, 지휘자
장르
장르클래식 음악

2. 생애

한스 피츠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구스타프 말러의 뒤를 잇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평가받지만, 그의 작품은 《팔레스트리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고, 평가 또한 부정적이었다.[1] 이는 그의 독선적인 성격, 반사회적인 경향, 그리고 여러 정치적 발언 때문이었다.[1] 피츠너는 스스로를 애국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로 여겼으며, 나치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국제 유대주의'를 인류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며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피츠너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난하고 유대인이 독일 사회 각계 지도층에 진출하는 것을 '국제주의'라는 명목으로 비판했는데,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이용당하는 원인이 되었다.[1] 그는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찬양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했다.[1] 1934년에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수상직의 일원화를 위한 '국민투표'에 '문화인의 성명'에 서명했다.[1] 1944년 5월에는 히틀러에게서 5만 마르크 이상의 증여금을 받았고,[1] 같은 해 8월에는 히틀러가 작성한 특별 리스트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음악가로 등재되어 전시 채무를 면제받았다.[1]

피츠너는 폴란드 점령 총독 한스 프랑크에게 헌정한 《크라카우의 환영(Krakauer Begrüung)》(1944)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1] 이 작품은 나치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축제의 인사말(Feierliche Begrüung)》로 개칭되었지만,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

1945년 이후 피츠너는 나치 정권에서의 자신의 입장을 이상에 대한 것으로 변호하며 소극적으로 보이려 노력했다.[1] 1947년 10월, 나치 활동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1] 그러나 독일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외면당했고, 재산 몰수로 인해 빈곤에 시달렸다.[1]

잉고 메츠마허가 2007년 독일 통일 기념일에 피츠너의 칸타타 《독일 정신에 대하여》를 연주하려 하자, 유대인 중앙협의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1] 협의회는 이 곡이 나치즘과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선동에 활용되었고 피츠너 본인도 나치 찬양에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

피츠너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그곳을 고향으로 여겼다.[1] 호흐 음악학교에서 이반 크노르에게 작곡을, 제임스 크바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1] 초기에는 코블렌츠 음악학교와 마인츠 국립극장에서 일했으며, 베를린 서쪽 극장을 거쳐 스트라스부르에서 오페라 감독 및 음악학교장으로 일하며 직업적 안정을 찾았다.[1]

제1차 세계 대전알자스-로렌프랑스에 합병되면서 피츠너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고, 이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1] 그는 엘리트 의식, 사회성 부족,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과소평가, 그리고 독일의 적들로부터 무시당한다는 피해 의식 등을 가지게 되었다.[1] 아내의 죽음(1926)과 장남의 정신병원 수용은 그의 문화적 비관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1]

피츠너의 대표작은 《팔레스트리나》(1917)로, 뮌헨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2]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2]

피츠너는 페루치오 부소니의 '새로운 음악 미학에 대한 스케치'에 대한 답변으로 팸플릿 《퓨처리스트 위협》("Futuristengefahr")을 썼고,[1] 파울 베커와도 논쟁을 벌였다.

피츠너는 바이올린 협주곡 B단조, 작품 34 (1923)를 알마 무디에게 헌정했다.[3] 이 곡은 한때 막스 브루흐의 첫 번째 협주곡 이후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3]

피츠너는 나치 독일의 중요 인물들과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브루노 발터와의 관계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1] 그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부수음악을 대체할 작품을 제공해 달라는 나치의 요청을 거부했다.[1]

피츠너는 히틀러와 1923년에 만났지만, 오토 바이닝거에 대한 히틀러의 말에 반박하여 관계가 악화되었다.[1] 히틀러는 피츠너를 '유대인 랍비'로 여겼고, 피츠너는 나치의 여러 직책 제안을 거절당했다.[1]

피츠너는 한스 프랑크와 빌헬름 프릭으로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지휘를 금지당했고, 뮌헨 오페라에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1] 1934년에는 강제 은퇴를 당하고 여러 직책을 잃었으며, 적은 연금으로 생활해야 했다.[1] 그는 자신이 이방인 혈통임을 증명해야 했고, 1939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1]

피츠너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견해는 모순적이었다.[1] 그는 유대인을 문화적 특징으로 보았고,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기여했다고 생각했다.[4] 그는 반유대주의 정책에 예외를 두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유대인 음악가들을 돕고 우정을 유지했다.[4] 그러나 그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사용하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중 피츠너의 집은 파괴되었고, 그는 나치즘에 반대하는 발언으로 뮌헨 음악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1] 전쟁 후 그는 나치 청산 과정을 거쳐 연금을 회복하고 잘츠부르크에서 거주 허가를 받았다.[1] 1949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그의 C장조 교향곡을 지휘했다.[1]

1990년대부터 피츠너의 음악과 생애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발해졌다.[5] 일부 학자들은 그가 나치 시대에 맞서 싸우려 노력한 유일한 작곡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 그러나 그의 나치와의 관계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다.[6]

2. 1. 어린 시절과 초기 활동 (1869-1896)

1869년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관현악단 단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 음악 교육을 받았다.[1] 1872년 가족과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1] 11세에 이미 첫 작품을 작곡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첫 작품은 1884년에 작곡한 가곡집이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프랑크푸르트의 호흐 음악학교에서 이반 크노르에게 작곡을, 제임스 크바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1]

1892년부터 1893년까지 코블렌츠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가르쳤다.[1] 1894년에는 마인츠 국립극장에서 무급 지휘자 견습을 했다.[1] 1895년 마인츠에서 오페라 《가엾은 하인리히》와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위한 부수음악 《솔하우그의 잔치》를 초연했다.[1]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는 1895년 《가엾은 하인리히》 초연에서 주역을 맡았다.[2]

1905년의 한스 피츠너

2. 2. 베를린 시기 (1897-1907)

1897년 베를린 슈테른 음악원 교사로 부임했고, 1898년 스승 크바스트의 딸 미미와 결혼했다. 1903년 베를린 서부 극장 초대 악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장남 파울이 태어났다.[1] 1905년 구스타프 말러가 이끄는 빈 궁정가극장에서 두 번째 오페라 《연애정원의 장미》가 초연되었다.

2. 3. 스트라스부르 시기 (1908-1918)

1908년 피츠너는 가족과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스트라스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시립음악원을 감독했다.[1] 1910년에는 스트라스부르 가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아 연출가로도 활동했으며,[1] 1913년에는 스트라스부르 가극장 교수로 임명되었다.[1]

1917년 뮌헨 섭정궁 극장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피츠너의 대표작인 음악적 전설의 악극 《팔레스트리나》가 초연되었다.[2] 토머스 만은 1917년 10월 발표한 짧은 수상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이 오페라의 가치를 인정했고, 이후 저서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에서도 다시 언급했다.[1]

2. 4. 전간기 (1919-1938)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알자스-로렌프랑스에 할양되면서 피츠너는 슈트라스부르크를 떠나 운터쇼도르프로 이사했다.[1] 1919년1920년에는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를 맡았으며,[1] 1920년에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 마스터클래스를 주재하였다.[1]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기반한 낭만주의적 칸타타 《독일 영혼에 관하여(Von deutscher Seele)》(1921년),[1]《피아노 협주곡 변호장조》(1922년),[1] 《바이올린 협주곡 로단조》(1923년),[1] 《현악사중주곡 嬰하단조》(1925년, 《교향곡 嬰하단조》(1932년)의 원곡)[1] 등은 이 시기에 완성된 주요 기악곡들이다. 이 작품들은 강렬한 표현 의욕에 의해 전통적인 화성법의 극한까지 추구하고 있다.

1926년 부인 미미 여사를 여읜 후 작곡한 합창 환상곡 《저승(Das dunkle Reich)》(1930년)도 위와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저승》은 미켈란젤로, 괴테,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기반한 애도 음악이다).[1]

2. 5. 만년 (1939-1949)

1934년 뮌헨 시립 음악원을 퇴직하고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1936년 장남 파울을 여의고 이듬해 차남 페터 및 장녀 아그네스와 불화를 겪었다. 1939년 말리 슈트르(Mali Stoll)와 재혼했다. 탄생 70주년 축하 행사는 10년 전보다 생기가 없었다. 전쟁 발발 후, 딸 아그네스는 193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1942년 피츠너는 뉘른베르크 인근 폭격으로 이동 중 타던 자동차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부부 모두 목숨을 건졌다.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뮌헨 자택이 파괴되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을 받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으로 피신, 난민 수용소에 수용된 뒤 뮌헨 라마스도르프의 양로원으로 옮겨졌다. 1948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당원 축출 과정 중 뮌헨 비나치화 심사 기관으로부터 법률과 관계없다는 등급과 함께 단순 나치 협력자로 판정받아 무죄를 받았다. 다만, 적극적 협력 혐의는 인정되어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고, 피츠너는 허름한 집에서 살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졌다.[1]

1948년 10월, 피츠너는 뇌졸중을 겪었으나 의료진의 빠른 대처로 회복했다. 1949년 2월, 빈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전후 첫 공연과 견본에 참여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안톤 브루크너가 마지막 생을 보낸 벨베데레의 카스트도데크(Custoden Stock) 저택을 제공했고, 피츠너는 빈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4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지휘를 위해 잘츠부르크 방문 중 두 번째 뇌졸중이 갑작스레 발병, 의료진이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4시간 뒤 별세했다. 지휘를 맡기로 한 연주회는 3일 뒤였다. 3일 후 모차르데움에서 추도 연주회가 열렸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첫 부인 미미 곁인 슌도프 묘지에 묻히길 원했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빈 국립중앙묘지 14C 구역에 안장되었다.[1]

3. 정치적 입장과 사회적 언동

피츠너는 스스로를 애국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로 칭했으며,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난하고 유대인을 "국제주의"라는 명목으로 비판했다.[1] 피츠너는 나치 정권에 협력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찬양했다. 1934년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수상직의 통합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문화인의 성명'에 서명했다. 1944년 히틀러로부터 이상의 증여금을 받았다. 그는 나치 정권의 실체를 알게 된 독일 국민들에게 비난받았다. 피츠너가 절친한 폴란드 점령 총독 한스 프랑크에게 1944년 작곡하여 헌정한 《크라쿠프의 환영》은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잉고 메츠마허가 2007년 동서독 통일기념일에 피츠너의 칸타타 《독일 정신에 대하여》를 연주하자 유대인중앙협의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중년 이후 피츠너는 점점 더 국수주의적으로 변모하였고, 처음에는 특히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한스 프랑크를 포함한 나치 독일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유대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오랫동안 음악적 교류를 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나치 주요 인사들과 사이가 멀어졌다.[1] 그는 나치 정권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사용할 수 있는 부수음악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는 유대인 출신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유명한 작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츠너는 멘델스존의 원곡이 자신이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작품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1923년 초, 피츠너와 히틀러는 만났다. 피츠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피츠너가 담낭 수술을 받았을 때, 두 사람 모두를 잘 알고 있던 안톤 드렉슬러가 만남을 주선했다. 히틀러가 대부분의 대화를 주도했지만, 피츠너는 동성애자이자 반유대주의 사상가인 오토 바이닝거에 관한 히틀러의 말에 반박하여 히틀러가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히틀러는 나치 문화 설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이 유대인 랍비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피츠너는 이 말을 알지 못하고 히틀러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믿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했을 때, 로젠베르크는 말솜씨가 서툰 피츠너를 같은 해 독일 문화 투쟁 연맹 강연자로 영입했고, 피츠너는 영향력 있는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작곡가가 뒤셀도르프의 오페라 감독이나 베를린 시립 오페라의 총감독직을 당의 꼭두각시들에게 내주도록 했다. 당국으로부터 두 직책 모두 그를 위해 비워두고 있다는 암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히틀러 통치 초기, 피츠너는 193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지휘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한스 프랑크(당시 바이에른 주 사법부 장관)와 빌헬름 프릭(히틀러 내각의 내무장관)으로부터 받았다. 피츠너는 1928년 뮌헨 오페라에서 안정적인 지휘 계약을 체결했지만, 수석 지휘자 한스 크나퍼츠부시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극장장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1934년 피츠너는 강제로 은퇴를 당하고 오페라 지휘자, 연출가, 아카데미 교수직을 잃었다. 그는 또한 한 달에 수백 마르크의 최소한의 연금을 받았는데, 이는 1937년 요제프 괴벨스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그가 항의한 것이었다. 1934년 나치 당 대회에서 피츠너는 지휘를 허락받기를 바랐지만, 그 역할은 거절당했고, 대회에서 그는 처음으로 히틀러가 자신을 반유대인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추측한 사람은 히틀러만이 아니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감독이자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비니프레트 바그너도 그렇게 믿었다. 피츠너는 자신이 사실 완전히 이방인 혈통임을 증명해야 했다. 1939년까지 그는 프랑크를 존경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치 정권에 대해 철저하게 환멸을 느꼈다.

피츠너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견해는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1] 그는 유대인을 인종적 특징이 아니라 문화적 특징으로 보았다. 연금 문제에서 그에게 어려움을 야기했던 1930년의 성명서는 유대인들이 "독일 정신 생활과 독일 문화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반유대주의 자체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4] 그는 반유대주의의 일반적인 정책에 예외를 두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를 바탕으로 한 하인리히 마르슈너의 오페라 『템플 기사와 유대인 여자』의 공연을 추천했고, 쾰른의 유대인 제자 펠릭스 볼페스를 보호했으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유대인 아내가 있는 젊은 지휘자 한스 슈비거를 도왔고, 브루노 발터와 특히 1933년 투옥된 "자기혐오적인" 비실천 유대인인 그의 어린 시절 기자 친구 폴 코스만과의 우정을 유지했다.

피츠너가 코스만을 위해 한 노력은, 우연히 피츠너의 첫 오페라를 초연한 영웅 테너의 아들이었던 게슈타포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 하여금 그를 조사하게 했을 수 있다. 피츠너의 청원은 아마도 1934년 코스만의 석방에 기여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2년 결국 재체포되어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이질로 사망했지만 말이다. 1938년 피츠너는 뮌헨의 유명한 안과 의사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농담을 했는데, "그의 증조할머니가 한때 4분의 1 유대인이 길을 건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유대인 음악가들과 함께 일했다. 1930년대 초 그는 후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유명한 알토 오틸리에 메츠거-라터만과 종종 독주회에서 함께했고, 1905년에 이미 그의 네 곡의 노래 작품 19번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그는 1909년 유대인 비평가이자 유대인 문화 사회 설립자인 아서 엘로에서에게 그의 노래 작품 24번을 헌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츠너는 발터 아벤트로트와 빅터 융크와 같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자 음악 비평가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고,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유대주의적 독설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4. 작품 목록

한스 피츠너는 후기 낭만파 음악 작곡가로, 오페라, 가곡,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피츠너는 로베르트 슈만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성악곡에서 그의 음악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가곡은 후고 볼프의 영향도 받았지만,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1930년대에는 유명한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슈가 피츠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그의 가곡 몇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9]

피츠너는 실내악곡, 협주곡, 교향곡 등 다양한 기악곡도 작곡했다.

다음은 피츠너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관현악 반주 합창곡'''

제목작품 번호작곡 연도비고
Der Blumen Rachede1888여성 합창, 알토,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라드 (페르디난트 프라이리그라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Gesang der Bardende1906남성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Von Deutscher Seelede작품번호 281921네 명의 독창자, 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곡
Das dunkle Reichde작품번호 381929소프라노, 바리톤,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합창 환상곡
Fons Salutiferde작품번호 481941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찬송가



'''가곡'''

작품번호제목연도작사가비고
초기 가곡 여섯 곡1884–87율리우스 슈툼, 메리 그라프-바솔로뮤, 루트비히 울란트,
오스카르 폰 레드비츠, 에두아르트 뫼리케, 로베르트 라이닉
매우 높은 고음
2가곡 일곱 곡1888–89리하르트 폰 폴크만, 헤르만 링, 알도프 뷜트거, 알렉산더 카우프만, 무명2, 5, 6, 7번은 관현악 편곡됨
3가곡 세 곡1888–89프리드리히 뤼케르트, 프리드리히 폰 잘렛, 에마누엘 가이벨중음. 2, 3번은 관현악 편곡됨.
4가곡 네 곡1888–89하인리히 하이네중음. 관현악 편곡됨.
5가곡 세 곡1888–89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소프라노. 1번은 관현악 편곡됨.
6가곡 여섯 곡1888–89하이네, 그룬, 파울 니콜라우스 코스만높은 바리톤을 위한 곡
7가곡 다섯 곡1888–1900볼프강 뮐러 폰 쾨니히스빈터, 아이헨도르프, 파울 하이세, 그룬3번은 관현악 편곡됨.
9가곡 다섯 곡1894–95아이헨도르프
10가곡 세 곡1889–1901데틀레프 폰 릴렌크론, 아이헨도르프중음을 위한 곡
11가곡 다섯 곡1901프리드리히 헤벨, 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 아이헨도르프,
리하르트 데멜, 카를 헤르만 부세
4, 5번은 관현악 편곡됨.
배신과 위로1903무명중음을 위한 곡. 관현악 편곡됨.
15가곡 네 곡1904부세, 아이헨도르프, 폰 스타흐2, 3, 4번은 관현악 편곡됨.
18달에게1906요한 볼프강 폰 괴테긴 노래 (약 8분). 관현악 편곡됨.
19가곡 두 곡1905부세
21가곡 두 곡1907헤벨, 아이헨도르프고음을 위한 곡
22가곡 다섯 곡1907아이헨도르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
24가곡 네 곡1909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카를 아우구스트 퍼스터 번역), 프리드리히 리엔하르트
1번은 관현악 편곡됨.
26가곡 다섯 곡1916프리드리히 헤벨, 아이헨도르프,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 요한 볼프강 폰 괴테2, 4번은 관현악 편곡됨.
29가곡 네 곡1921프리드리히 횔덜린, 뤼케르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멜그의 가족에게 헌정. 3번은 관현악 편곡됨.
30가곡 네 곡1922니콜라우스 레나우, 에두아르트 뫼리케, 데멜
32가곡 네 곡1923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바리톤 또는 베이스를 위한 곡
33옛 노래1923고트프리트 켈러
35연애가곡 여섯 곡1924리카르다 후흐여성 목소리
40가곡 여섯 곡1931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 아돌프 바르텔스, 리카르다 후흐,
마르틴 그라이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아이헨도르프
5, 6번은 관현악 편곡됨.
41소네트 세 편1931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뷔르거 번역), 아이헨도르프남성 목소리



'''교향곡'''


  • 교향곡 올림다단조 Op. 36a (1932년, 현악 사중주 3번을 바탕으로 새롭게 작곡)[1]
  • 교향곡 사단조 Op. 44 (1939년)[1]
  • 교향곡 다장조 Op. 46 '우정에 기대어' (1940년)[1]


'''협주곡'''

  • 바이올린과 첼로, 관현악을 위한 이중 소협주곡 Op. 43 (1937년)
  • 첼로 협주곡 0번 가단조 (1888년)
  • 첼로 협주곡 1번 사장조 Op. 42 (1935년)
  • 첼로 협주곡 2번 가단조 Op. 52 (1944년)
  •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 Op. 32 (1922년)
  • 바이올린 협주곡 나단조 Op. 34 (1923년)


'''관현악곡'''

  • 스케르초 다단조 (1887년)
  • 비가와 윤무 (1940년)
  • 크라카우의 환영 (1944년)
  • 환상곡 가단조 (1947년)


'''실내악곡'''

제목작품 번호작곡 연도비고
B♭장조 피아노 삼중주곡1886게르하르트 프롬멜이 완성
D단조 현악 사중주 [제1번] || – || 1886 ||
F#단조 소나타 (첼로와 피아노)작품 11890„Das Lied soll schauern und beben…“
F장조 피아노 삼중주곡작품 81890–96
D장조 현악 사중주 [제2번] || 작품 13 || 1902–03 ||
C장조 피아노 오중주곡작품 231908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E단조 소나타작품 271918
C#단조 현악 사중주 [제3번] || 작품 36 || 1925 ||
C단조 현악 사중주 [제4번] || 작품 50 || 1942 ||
비정형 푸가토1943현악 사중주를 위해
G단조 육중주곡작품 551945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피아노를 위해



'''피아노곡'''


  • 《연주회용 왈츠 가단조》 (1892년, 소실)
  • 《5개의 소품》 Op. 47 (1941년)
  • # 마지막 저항
  • # 흥겹게 뛰어놀며
  • # 성스러운 문자
  • # 혼란스러워하며
  • # 선율
  • 《6개의 연습곡》 Op. 51 (1943년)

4. 1. 무대 음악

피츠너는 오페라 외에도 여러 편의 극 부수음악을 작곡했다. 1905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희곡 하일브론의 케트헨을 위한 부수음악(Op. 17)을 작곡했는데, 이 곡의 서곡은 같은 해 10월 19일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초연되었고, 다른 곡들은 이후 공연에 추가되었다.[17] 헨리크 입센의 희곡 『솔헤우그의 잔치』를 위한 부수음악(WoO 18)은 1889년에서 1890년 사이에 작곡되어 1895년 11월 28일 마인츠에서 초연되었으며, 피츠너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17]

피츠너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위한 새로운 부수음악 작곡을 거부했다.[17]

4. 1. 1. 오페라

제목부제작품 번호대본 작가작곡 연도초연비고
데어 아르메 하인리히(Der arme Heinrich)3막의 음악극WoO 15하르트만 폰 아우에 원작, 제임스 그룬(1868–1928) 각색1891–18931895년, 마인츠초연 당시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 출연
디 로제 폼 리베스가르텐(Die Rose vom Liebesgarten)서주, 2막, 후주가 있는 낭만 오페라WoO 16제임스 그룬1897–19001901년, 엘베르펠트
다스 크리스텔플라인 (1차 버전)(Das Christ-Elflein)크리스마스 이야기Op. 20일제 폰 슈타흐19061906년, 뮌헨
다스 크리스텔플라인 (2차 버전)(Das Christ-Elflein)2막의 슈필오페라Op. 20일제 폰 슈타흐, 피츠너19171917년, 드레스덴1944년 추가적인 미발표 개정판 존재
팔레스티나(Palestrina)3막의 음악적 전설WoO 17피츠너1909–19151917년, 뮌헨작곡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
다스 헤르츠(Das Herz)3막(4장면) 음악극Op. 39한스 마흐너-몬스(1883–1956)1930–311931년, 베를린 & 뮌헨


4. 1. 2. 극 부수음악


  • Musik zu ''Das Fest auf Solhaug'' von Henrik Ibsen|헨리크 입센의 희곡 『솔헤우그의 잔치』 부수음악de WoO 18 (작곡: 1889년-1890년, 초연: 1895년 11월 28일 마인츠, 헌정: 부모에게)[17]
  • Musik zu ''Das Käthchen von Heilbronn'' von Heinrich von Kleist|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희곡 『하일브론의 케트헨』 부수음악de 작품 17 (작곡: 1905년, 초연: 서곡만 1905년 10월 19일 베를린 독일극장; 다른 곡들은 차례로 공연에 추가됨, 헌정: (''Dem unvergänglichen Dichter als geringe Huldigung''))[17]

4. 2. 성악곡

한스 피츠너는 슈만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다수의 가곡을 작곡했다.[9] 그의 가곡은 후고 볼프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유의 우울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9] 1930년대에는 저명한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슈가 피츠너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그의 가곡 몇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9]

작품번호제목연도작사가비고
초기 가곡 여섯 곡1884–87율리우스 슈툼(Julius Sturm), 메리 그라프-바솔로뮤(Mary Graf-Bartholomew), 루트비히 울란트(Ludwig Uhland),
오스카르 폰 레드비츠(Oskar von Redwitz), 에두아르트 뫼리케(Eduard Mörike), 로베르트 라이닉(Robert Reinick)
매우 높은 고음
2가곡 일곱 곡1888–89리하르트 폰 폴크만(Richard von Volkmann), 헤르만 링(Hermann Lingg),
알도프 뷜트거(Aldof Böttger), 알렉산더 카우프만(Alexander Kaufmann), 무명
2, 5, 6, 7번은 관현악 편곡됨
3가곡 세 곡1888–89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 프리드리히 폰 잘렛(Friedrich von Sallet), 에마누엘 가이벨(Emanuel Geibel)중음. 2, 3번은 관현악 편곡됨.
4가곡 네 곡1888–89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중음. 관현악 편곡됨.
5가곡 세 곡1888–89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소프라노. 1번은 관현악 편곡됨.
6가곡 여섯 곡1888–89하이네, 그룬(Grun), 파울 니콜라우스 코스만(Paul Nikolaus Cossmann)높은 바리톤을 위한 곡
7가곡 다섯 곡1888–1900볼프강 폰 쾨니히스빈터, 아이헨도르프, 파울 하이세(Paul Heyse), 그룬3번은 관현악 편곡됨.
9가곡 다섯 곡1894–95아이헨도르프
10가곡 세 곡1889–1901데틀레프 폰 릴렌크론(Detlev von Lilencron), 아이헨도르프중음을 위한 곡
11가곡 다섯 곡1901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 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Ludwig Jacobowski), 아이헨도르프,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 카를 헤르만 부세(Carl Hermann Busse)
4, 5번은 관현악 편곡됨.
배신과 위로 (Untreu und Trost)1903무명중음을 위한 곡. 관현악 편곡됨.
15가곡 네 곡1904부세, 아이헨도르프, 폰 스타흐(von Stach)2, 3, 4번은 관현악 편곡됨.
18달에게 (An den Mond)1906괴테긴 노래 (약 8분). 관현악 편곡됨.
19가곡 두 곡1905부세
21가곡 두 곡1907헤벨, 아이헨도르프고음을 위한 곡
22가곡 다섯 곡1907아이헨도르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Gottfried August Bürger)
24가곡 네 곡1909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페트라르카 (카를 아우구스트 퍼스터(Karl August Förster) 번역), 프리드리히 리엔하르트(Friedrich Lienhard)
1번은 관현악 편곡됨.
26가곡 다섯 곡1916프리드리히 헤벨, 아이헨도르프,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 괴테2, 4번은 관현악 편곡됨.
29가곡 네 곡1921횔더린, 뤼케르트, 괴테, 데멜그의 가족에게 헌정. 3번은 관현악 편곡됨.
30가곡 네 곡1922니콜라우스 레나우(Nikolaus Lenau), 뫼리케, 데멜
32가곡 네 곡1923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Conrad Ferdinand Meyer)바리톤 또는 베이스를 위한 곡
33옛 노래 (Alte Weisen)1923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35연애가곡 여섯 곡1924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여성 목소리
40가곡 여섯 곡1931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 아돌프 바르텔스(Adolf Bartels), 리카르다 후흐,
마르틴 그라이프, 괴테, 아이헨도르프
5, 6번은 관현악 편곡됨.
41소네트 세 편1931페트라르카 (뷔르거 번역), 아이헨도르프남성 목소리


4. 2. 1. 관현악 반주 합창곡


  • 알토 독창과 여성 합창, 관현악을 위한 《꽃들의 복수》(Der Blumen Rache) (1888년)[17]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투』에서 《음유시인의 노래》(Gesang der Barden) (1906년)[17]
  • 독창과 합창, 관현악, 오르간을 위한 칸타타 《독일 정신에 대하여》(Von deutscher Seele) Op.28 (1921년)[17]
  • 관현악, 오르간, 소프라노, 바리톤 독창에 의한 합창곡 《명토환상곡》(Das dunkle Reich) Op.38 (1929년~1930년)[17]
  • 혼성 합창과 관현악, 오르간을 위한 《건강의 샘》(Fons salutifer) Op.48 (1941년)[17]


제목작품 번호작곡 연도비고
Der Blumen Rachede1888여성 합창, 알토,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라드 (페르디난트 프라이리그라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Gesang der Bardende1906남성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Von Deutscher Seelede작품번호 281921네 명의 독창자, 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곡
Das dunkle Reichde작품번호 381929소프라노, 바리톤,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합창 환상곡
Fons Salutiferde작품번호 481941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찬송가


4. 2. 2. 가곡

피츠너는 슈만과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다수의 가곡을 작곡했다.[9] 그의 가곡은 후고 볼프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유의 우울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9] 1930년대에는 저명한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슈가 피츠너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그의 가곡 몇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9]

작품번호제목연도작사가비고
초기 가곡 여섯 곡 (Six Early Songs)1884–87율리우스 슈툼(Julius Sturm), 메리 그라프-바솔로뮤(Mary Graf-Bartholomew), 루트비히 울란트(Ludwig Uhland),
오스카르 폰 레드비츠(Oskar von Redwitz), 에두아르트 뫼리케(Eduard Mörike), 로베르트 라이닉(Robert Reinick)
매우 높은 고음
2가곡 일곱 곡 (Seven Songs)1888–89리하르트 폰 폴크만(Richard von Volkmann), 헤르만 링(Hermann Lingg),
알도프 뷜트거(Aldof Böttger), 알렉산더 카우프만(Alexander Kaufmann), 무명
2, 5, 6, 7번은 관현악 편곡됨
3가곡 세 곡 (Three Songs)1888–89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 프리드리히 폰 잘렛(Friedrich von Sallet), 에마누엘 가이벨(Emanuel Geibel)중음. 2, 3번은 관현악 편곡됨.
4가곡 네 곡 (Four Songs)1888–89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중음. 관현악 편곡됨.
5가곡 세 곡 (Three Songs)1888–89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소프라노. 1번은 관현악 편곡됨.
6가곡 여섯 곡 (Six Songs)1888–89하이네, 그룬(Grun), 파울 니콜라우스 코스만(Paul Nikolaus Cossmann)높은 바리톤을 위한 곡
7가곡 다섯 곡 (Five Songs)1888–1900볼프강 폰 쾨니히스빈터, 아이헨도르프, 파울 하이세(Paul Heyse), 그룬3번은 관현악 편곡됨.
9가곡 다섯 곡 (Five Songs)1894–95아이헨도르프
10가곡 세 곡 (Three Songs)1889–1901데틀레프 폰 릴렌크론(Detlev von Lilencron), 아이헨도르프중음을 위한 곡
11가곡 다섯 곡 (Five Songs)1901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 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Ludwig Jacobowski), 아이헨도르프,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 카를 헤르만 부세(Carl Hermann Busse)
4, 5번은 관현악 편곡됨.
배신과 위로 (Untreu und Trost)1903무명중음을 위한 곡. 관현악 편곡됨.
15가곡 네 곡 (Four Songs)1904부세, 아이헨도르프, 폰 스타흐(von Stach)2, 3, 4번은 관현악 편곡됨.
18달에게 (An den Mond)1906괴테긴 노래 (약 8분). 관현악 편곡됨.
19가곡 두 곡 (Two Songs)1905부세
21가곡 두 곡 (Two Songs)1907헤벨, 아이헨도르프고음을 위한 곡
22가곡 다섯 곡 (Five Songs)1907아이헨도르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Gottfried August Bürger)
24가곡 네 곡 (Four Songs)1909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페트라르카 (카를 아우구스트 퍼스터(Karl August Förster) 번역), 프리드리히 리엔하르트(Friedrich Lienhard)
1번은 관현악 편곡됨.
26가곡 다섯 곡 (Five Songs)1916프리드리히 헤벨, 아이헨도르프,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 괴테2, 4번은 관현악 편곡됨.
29가곡 네 곡 (Four Songs)1921횔더린, 뤼케르트, 괴테, 데멜그의 가족에게 헌정. 3번은 관현악 편곡됨.
30가곡 네 곡 (Four Songs)1922니콜라우스 레나우(Nikolaus Lenau), 뫼리케, 데멜
32가곡 네 곡 (Four Songs)1923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Conrad Ferdinand Meyer)바리톤 또는 베이스를 위한 곡
33옛 노래 (Alte Weisen)1923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35연애가곡 여섯 곡 (Six Liebeslieder)1924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여성 목소리
40가곡 여섯 곡 (Six Songs)1931루트비히 야코보프스키, 아돌프 바르텔스(Adolf Bartels), 리카르다 후흐,
마르틴 그라이프, 괴테, 아이헨도르프
5, 6번은 관현악 편곡됨.
41소네트 세 편 (Three Sonnets)1931페트라르카 (뷔르거 번역), 아이헨도르프남성 목소리


4. 3. 기악곡

프피츠너는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 등 다양한 기악곡을 작곡했다.

1886년 게르하르트 프롬멜(Gerhard Frommel)이 완성한 B♭장조 피아노 삼중주곡을 시작으로, F#단조 소나타 (첼로와 피아노)(1890), F장조 피아노 삼중주곡(1890–96), C장조 피아노 오중주곡(1908),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E단조 소나타(1918) 등 여러 실내악곡을 작곡했다. 또한, D단조 현악사중주 [제1번](1886), D장조 현악사중주 [제2번](1902–03), C#단조 현악사중주 [제3번](1925), C단조 현악사중주 [제4번](1942) 등 네 개의 현악 사중주를 남겼다. 1943년에는 비정형 푸가토를 작곡했고, 1945년에는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피아노를 위한 G단조 육중주곡을 작곡했다.

협주곡으로는 바이올린과 첼로, 관현악을 위한 이중 소협주곡(1937)과 첼로 협주곡 0번 가단조(1888), 첼로 협주곡 1번 사장조(1935), 첼로 협주곡 2번 가단조(1944) 등 세 개의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다.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1922)와 바이올린 협주곡 나단조(1923)도 그의 주요 협주곡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나단조 Op.34는 1923년에 작곡되어 바이올리니스트 알마 무디에게 헌정되었으며, 그녀는 1924년 6월 4일 뉘른베르크에서 프핏츠너의 지휘로 초연했다.[3] 무디는 이 곡을 50회 이상 연주하며 주요 연주자로 활동했다.[3]

교향곡 올림다단조(1932), 교향곡 사단조(1939), 교향곡 다장조(1940) 등 세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교향곡 올림다단조는 1932년에 현악4중주 3번(1925)을 바탕으로 새롭게 작곡된 곡이다.[1]

관현악곡으로는 스케르초 다단조(1887), 비가와 윤무(1940), 크라카우의 환영(1944), 환상곡 가단조(1947) 등이 있다.

피아노곡으로는 《연주회용 왈츠 가단조》(1892, 소실), 《5개의 소품》(1941), 《6개의 연습곡》(1943)이 있다.

4. 3. 1. 교향곡


  • 교향곡 올림다단조 (''Sinfonie cis-moll'') Op.36a (1932년, 현악4중주 3번(1925)을 바탕으로 새롭게 작곡된 곡이다.)[1]
  • 교향곡 사단조 (''Sinfonie G-Dur'') Op.44 (1939년)[1]
  • 교향곡 다장조 (''Sinfonie C-Dur'') Op.46 '우정에 기대어' (1940년)[1]

4. 3. 2. 협주곡


  • 바이올린과 첼로, 관현악을 위한 이중 소협주곡 Op.43 (1937년)
  • 첼로 협주곡 0번 가단조 (1888년)
  • 첼로 협주곡 1번 사장조 Op.42 (1935년)
  • 첼로 협주곡 2번 가단조 Op.52 (1944년)
  •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 Op.32 (1922년)
  • 바이올린 협주곡 나단조 Op.34 (1923년)

4. 3. 3. 관현악곡


  • 스케르초 다단조 (1887년)
  • 비가와 윤무 (1940년)
  • 크라카우의 환영 (1944년)
  • 환상곡 가단조 (1947년)

4. 3. 4. 실내악곡

제목작품 번호작곡 연도비고
B♭장조 피아노 삼중주곡1886게르하르트 프롬멜(Gerhard Frommel)이 완성
D단조 현악사중주 [제1번] || – || 1886 ||
F#단조 소나타 (첼로와 피아노)작품 11890„Das Lied soll schauern und beben…“
F장조 피아노 삼중주곡작품 81890–96
D장조 현악사중주 [제2번] || 작품 13 || 1902–03 ||
C장조 피아노 오중주곡작품 231908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E단조 소나타작품 271918
C#단조 현악사중주 [제3번] || 작품 36 || 1925 ||
C단조 현악사중주 [제4번] || 작품 50 || 1942 ||
비정형 푸가토1943현악사중주를 위해
G단조 육중주곡작품 551945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피아노를 위해


4. 3. 5. 피아노곡


  • 《연주회용 왈츠 가단조》(Konzertwalzer a-moll) (1892년, 소실)
  • 《5개의 소품》(Fünf Stücke für Klavier) Op.47 (1941년)
  • # 마지막 저항
  • # 흥겹게 뛰어놀며
  • # 성스러운 문자
  • # 혼란스러워하며
  • # 선율
  • 《6개의 연습곡》(Sechs Studien für das Pianoforte) Op.51 (1943년)

5. 수상력

연도수상 내역
1917년스웨덴 왕립음악원 명예교수
1925년메리트 훈장 문예부문
1930년뮌헨시 기념금화
1931년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 베토벤상
1934년프랑크푸르트시 괴테상[1]
1935년자유도시 및 한자동맹 함부르크시 브람스 메달[1]
1939년작센주 플로부르크시 명예시민[1]
1942년발터란트 음악상[1]
1943년시 베토벤상[1]
1944년빈 시 기념주화[1]
1957년시 리징에 피츠너 거리(Pfitzner gasse) 명명[1]


6. 일화

피츠너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부수음악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윌리엄 셰익스피어한여름 밤의 꿈을 위한 새로운 부수음악 작곡을 거부했다.[1]

참조

[1] 서적 Composers of the Nazi Era: Eight Portraits Oxford University Press
[2] 음반노트
[3] 웹사이트 Alma Moodie and the Landscape of Giftedness http://search.inform[...]
[4] 서적 The Music of Hans Pfitzner (Oxford Monographs on Music)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Hans Pfitzner: Mit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Rowohlt
[6] 서적 Hans Pfitzner im Nationalsozialismus Metzler
[7] 서적 dtv-Atlas zur Musik: Tafeln und Text, Vol. 2: Historischer Teil: Vom Barock bis zur Gegenwart Bärenreiter Verlag
[8] 서적 Riemann Musiklexikon, Vol. 2 Schott
[9] 뉴스 Warum ein Linker die Musik der Nazi-Zeit dirigert https://www.welt.de/[...] Die Welt 2008-01-03
[10] 서적 Beruf und Handwerk des Komponisten – Illusionslose Gespräche, Kritiken, Aufsätze
[11] 서적 Mein Leben Fischer Taschenbuch Verlag
[12] 서적 Glanz und Elend der deutschen Oper Böhlau Verlag
[13] 서적 Hans Pfitzner – Mit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Rowohlt
[14] 서적 Ausgesprochen – Schriften und Gespräche, Volume 1 Schott
[15] 서적 Das Kulturlexikon zum Dritten Reich. 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S. Fischer
[16] 서적 Hans Pfitzner Briefe
[17] 서적 Hans Pfitzner
[18] 뉴스 Leserbrief von Margret Grüninger Die Zeit 194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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